독일이 나치당 손아귀에 넘어간 후, 1934년 6월, 아돌프 히틀러가 포르쉐의 설립자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국민차 개발을 지시하면서 시작된 프로젝트에 따라 1937년 5월, 베를린에서 독일노동전선(German Labour Front)에 의해 설립된 회사로, 1938년 9월 폭스바겐(Volkswagenwerk GmbH)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당시, 히틀러의 국민차 프로젝트의 요구 조건은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을 태우고 100km/h로 달릴 수 있으며, 일천 마르크로 구매가 가능한 자동차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체코슬로바키아 타트라사의 T97 모델을 도용 - 실제, 타트라사는 Kdf-wagen이 발표된 후, 폭스바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하였으나,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소송이 중단되었고, T97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 하여 Kdf-Wagen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하였다. Kdf는 히틀러가 명명한 것으로 Kraft der Freude의 머리글자로 ‘즐거움의 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프로토타입이 도로를 운행하고 있을 즈음, 대중들은 이 차를 ‘비틀’이라고 불렀다. 모델 공개 후, 33만대가 예약되는 등 인기를 얻었으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양산되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폭스바겐은 군수공장으로 전환하여 퀴벨바겐과 슈빔바겐 등을 생산했다. 1945년 독일의 패전 이후, 영국군 소령 이반 허스트와 대령 레드클리프의 도움으로 영국군에 보급할 자동차를 생산 할 수 있었다. 영국 군정은 폭스바겐을 영국, 미국 등의 자동차 업체들에게 인수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 실제, 포드사에게 비용없이 폭스바겐을 인수하라고 제안하지만, 헨리포드2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 미국의 독일 응징 정책이 후버대통령에 의하여 서독 경제를 부흥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면서 폭스바겐은 독일 재건의 중요한 축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라인리히 노르토프가 1948년 사장에 취임하게 된 후, 그는 비틀의 디자인과 설계 원형은 유지하면서 품질향상에 주력하였고,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1949년 폭스바겐의 비틀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으나 실제 딜러를 통해 매매가 이루어진 대수는 2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독일에 주둔했던 미군들이 이 차를 갖고 귀국해 ‘비틀’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기 시작하고, 공격적인 판매정책을 펼치자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1955년에만 100만대가 판매되었으며 1972년 2월에는 포드 모델 T가 가지고 있던 단일 모델 최다판매 기록을 갱신하였다. 비틀의 판매호조에 힘을 얻은 폭스바겐은 1964년 아우토 우니온(현 아우디)을 다임러-벤츠로부터 인수하였다.
1961년 생산라인을 확장하면서 type-3(카르만 기아, 너치백, 패스트백 등) 모델을 런칭하였고 1969년에는 type-4를 출시하였다. 1973년 비틀의 판매량이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type-3 모델과 type-4형 모델도 극도로 저조한 실적을 나타내며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때, 전륜구동식과 수냉식 엔진에 높은 기술력을 보유한 자회사 아우토 우니온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대의 폭스바겐 모델라인업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973년 아우디 80/폭스를 기반으로 한 파사트, 1974년 시로코, 골프, 1975년 아우토 우니온의 아우디50을 기반으로 폴로, 1979년 제타 등 ‘다양한 차종을 양산하는 전략’과 ‘유럽시장의 판매량 1위’를 위해 집중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유럽에서 단단한 기반을 다진 것과는 반대로 미국 시장에서는 일본차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매출이 급감하게 되었는데, 1983년 골프 2세대가 출시되며 재차 반등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1982년 폭스바겐은 스페인의 세아트, 1990년 체코의 스코다를 인수하면서 ‘멀티 브랜드 전략’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98년 부가티와 람보르기니, 벤틀리를 손에 넣었다. 2008년 폭스바겐을 인수하려는 시도를 펼친 포르쉐가 지분을 51% 확보하며 인수가 성사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에 따른 포르쉐의 대출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2009년 역으로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하였다.
폭스바겐이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가 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이며 폭스바겐의 앰블럼은 사내 직원들의 공모를 통하여 선정되었는데, 비틀의 엔지니어였던 프란츠 라임스피스가 제안한 W자 위에 V자가 얹혀진 단순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로고가 채택된 것이다.